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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과 만해축전 대상 시상식 방문 후기

NGO글로벌뉴스 | 기사입력 2023/08/13 [20:19]

만해마을과 만해축전 대상 시상식 방문 후기

NGO글로벌뉴스 | 입력 : 2023/08/13 [20:19]
https://blog.naver.com/minjk1/223182430557

  © NGO글로벌뉴스  만해 실천대상 곽병은 원장

 

  © NGO글로벌뉴스  황포 민정기 훈장

 

訪卍海村而施賞式


​                                                                                                                          黃布 閔貞基

 

●○●●●○◎ 禪師卍海 入廛呈

○●○○●●◎ 施賞秋香 自得平

○●○○○●● 流水人生 觀裕杳

○○●●●○◎ 風霜歲月 悟寬鳴

 

●○●●○○● 大轉法輪 千溪沫

●●○○●●◎ 磨杵剸韋 萬象成

●●●○○●● 喝破一聲 天律界

○○○●●○◎ 無今無古 億蒼生

 

선사 만해가 입전하여 세상에 바치니

시상하는 가을향기 스스로 평심을 얻네

유수 인생이라 묘연한 여유로움 보이고

풍상 세월이라 관대한 깨우침을 울리네

 

법륜을 크게 굴려 천계의 포말이 생겨났고

마저 전위1)로 만상을 이루게 했구나

하늘법률에다가 일성을 갈파하니

옛날에도 지금에도 없는 억조를 창생하리라

 

(七言律詩 平起式 正格, 庚統: , , , , )

  © NGO글로벌뉴스

 

* 마저전위(磨杵剸韋) : 마저절위(磨杵絶韋)()()으로 조절한 것, 그 뜻은 마저(磨杵)는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뜻이고, 절위(絶韋)는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져 버렸다는 뜻이다. 수없이 많은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2023.8.11.()~12.() 양일간 재경문학회 회원 11명은 강원도 인제군 동국대학교 만해마을에서 개최하는 문인의 집대강당에서 진행한 시 교육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백담사에서 유나스님의 대법륜을 듣는 차담회를 개최하였으며, 아울러 인제하늘내린센터 대공연장에서 개최한 27회 만해대상 시상식에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깨우친 만해(卍海)사상의 핵심이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억조창생이 바로 내 마음안에 있는 것이고, 내 마음안의 그것을 깨우쳐서 대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그 자비로운 마음씨로 인생의 대법륜을 세차게 굴린다.”고 하는 만해 선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가 가고자 하는 목표지는 어디일까? 심우도를 가지고 살펴본다면, 인우구망(人牛俱忘)이라는 것이다. 내가 얻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곧바로 그곳에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기 자신도 잊어버려야 한다는 상태를 묘사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인우(人牛)란 주관과 객관으로서의 나와 소()를 파악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도구라는 것도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상태로 가면 그것의 미래는 점차 소멸하게 되는 법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식속에 텅빈 원상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 객관이었던 소를 잊게되면 자연적으로 주관인 자신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야만이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되는 것이다.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을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참으로 이것이 어렵다. 유수인생(流水人生)과 풍상세월(風霜歲月)속에서 지금에서 깨달음을 어떻게 알고 표현하겠는가!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였다.

 

6년의 가혹한 고행(苦行) 끝에 도()를 터득한 것이다. 어떠한 것도 바로 근본 자리로 돌아온다는 대법륜을 깨우치신 것이다. 냇물은 저절로 망망히 흐르고, 꽃은 저절로 붉게 피고 있다. 조그마한 번뇌에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를 찾는 방편이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대각(大覺) 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모든 양 극단을 버렸다는 말이다. , 상대적인 진리를 버리고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나선 것이다. 시비(是非), 선악(善惡), 이해(利害), 정사(正邪), 공사(公私)의 어느것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 때만이 상대의 모순을 깨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기 위해, 중생들에게 병을 치유하고 복과 덕을 담은 포대를 주는 것이다. , 불교의 궁극적인 뜻은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다.

 

만해마을에서 개최한 시 교육학술세미나에서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님의 바보야 문학교육이 문제다.”는 기조강연을 들었다. 그의 겅연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가 미쳐 날뛰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에 핵심으로는 국어와 문학은 가를수 없는 카테고리인데, 정책당국에서는 국어에는 문학이 없다고 이분법적으로 국어정책을 나누었다.”는데 대하여 혹독한 평가를 하면서, 시 하나를 가지고 국어를 읽고 쓰고 듣게 하는 것이 바로 국어공부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국어교수의 문제를 참담하다고까지 평가하였다.

 

문학을 국어가 아닌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의 한 분야로 취급하여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이 되어 국어교과서에서 문학작품이 거의 추방되다시피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우리 중등학교 문학교육은 몇시간 되지도 않고 오히려 다른 학과목의 교육시간으로 대체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문학은 국어가 아니며, 국어란 듣기 쓰기 말하기 등의 언어 교육인데 비하여 문학은 예술이기 때문에 국어가 아니라고 강변한다고 했다. 참 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천치와 같은 현재의 교육방식이다? 화가 난다.

 

국어수업의 문제인데, 교수님이 대학입시의 구두시험에 관여해 본적이 있었는데, 시 한편 외어보라는 주문에 6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 제대로 시 한편 외운 학생이 불과 6명에 불과하였다는 실증자료를 제시하였다. 6명조차도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소위 짧은 낙서시(洛書詩)들을 외웠다며, 응시생 반 이상이 시를 외우지 못하겠다고 문을 박차고 나갔으며,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시한편 외우지 못해 스스로 11점을 포기하는 국어 수업교육의 형태를 비판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양인이 되기 위해 학생들에게 시 한편은 외우도록 해야 한다. 시 한편속에는 듣기 말하기 쓰기가 모두 활용되며 이를 통해 미적 감수성, 상상력, 창조적 발상, 미학적 구조나 언어의식이 모두 함께 응축되어 함축적으로 쓰여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보편적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시한편을 외우게 하는 것이 국민의 창의력 개발이나 국가 발전의 원동력에 이바지 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금의 획일화된 교육풍토를 조속 쇄신해야 할 것이다. 정말 바보야! 시 한편 외워보자구나.

 

우리는 백담사(百潭寺)로 갔다. 백담사는 산에서 절까지 백개의 물웅덩이를 가진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과 개울물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곳까지 들어가는데 수없이 많은 버스가 쉴새없이 운행되고 있었다. 사실 그 길은 오솔길 외길이라서 버스가 두 대가 지나갈 수 없기에 공용버스는 서로 연락을 해가면서 그곳을 운행하고 있었다.

 

승용차가 서로 부닥치면 뒤로 빠구해 가면서 길을 비껴주어야 하기에 운전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그런 구불구불 산골을 몇 구비 돌고 돌아 백담사에 도착해서 너무 좋은 자연환경에 감탄해 하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곳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특별히 마련된 유나 영진스님의 대법륜을 듣는 차담회 시간이었다.

 

그는 참 얼굴이 하얏고 귀인처럼 품위가 있었다. 말소리도 굵고 맑아 믿음직한 성향의 깔끔한 말씨였다. 참 알 수 없는, 모든 완성과 성취를 득한, 깨달음을 득도한 마하반야의 용선을 타고 용왕매진(勇往邁進)하는 자신의 법륜을 열심히 설파하였다.

 

그 모습에 취해 우리는 한동안 멍하니 그의 설법만 듣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치장된 사진을 손으로 가리치며 저 연꽃은 아주 더러운 곳에서 깨끗하게 피어나 그 향기를 온 천지에 내뿝는다. 저 수미산은 산꼭대기가 눈으로 덮혀 4줄기 어머니의 산으로 4개 큰 강을 뿜어 내리고 있다. 이곳 황산은 그 누구도 그곳에 올라가지 못하는 산으로 하늘의 천명이 내려지는 소도(蘇塗)와 같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참 의미있는 멋진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선사(禪師)로서 불교조계종의 유나(維那)의 직책을 맡고 있는데, 하나의 철학과 같은 맥을 우리에게 명쾌하게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우리 불도(佛徒)는 모두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다. 또 그 믿음으로 부처가 되기위해 수행을 거듭한다. 특히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그 도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아(無我)인 것을 깨닫고 이를 대중에게 설파해야 한다. 많은 분들이 도를 통하면 죽음을 초월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도를 통한다는 것은, 안 죽기 위해 도를 통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자유로워지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일뿐이다. 자유로워지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 내용이며, 그것이 괴로움의 세상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도달하는 첩경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은 어떻게 들어갈까? 괴로움의 세상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이르는, 무명의 휩싸인 거짓 나에서 깨달아 밝아진 참 나, 바로 이 혼탁하고 오염된 이 세상에서 지혜와 자비로 가득한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아(無我)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바라밀(波羅蜜)은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생기는 괴로움의 세상에서 이러한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를 가지고 깨달음의 세계로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수행을 반복하고 있으나, 진짜 발심이 안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한다. 이런 것 때문에 영원히 살수 있는, 생사를 따르지 않는, “이 사바세계에서 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참 주인공임을 제대로 참구(參究)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무상심이 나올 때 비로소 제대로 발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도피안(到彼岸)을 이해하고, 중도 정견을 갖추고 나서 정진해야 한다. 중도 정견이란 음양의 상대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한다. 말하자면 범망경중생이 84천이니, 부처도 84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선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다.

 

그러니 중생이 부처이고, 생사가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이고 깨달음이니 둘로 나누지 않아야 한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 괴로움은 괴로움이고, 깨달음은 깨달음이지, 어떻게 그 둘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면 안된다. 그것을 한 모습으로 보는 것이 중도다. 그래서 중도 정견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만 한다.

 

중도 정견을 갖추는 방법에는 몇가지가 있다. 물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맛을 봐야 제대로 알게 되는 것과 매한가지다. 그 전에는 그저 유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자기가 직접 행동해 봐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하는 작업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수행하는 것이다신심을 알아야 한다. (이후에는 육바라밀 참고용: 그 중 첫째가 보시(布施)로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둘째가 지계(持戒)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셋째가 인욕(忍辱)으로 욕됨을 참고 남을 용서함이다. 넷째가 정진(精進)으로 끊임없이 노력함이요, 다섯째가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여섯째가 지혜(知慧)반야(般若)으로 지혜를 이룸을 말한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다. 부처는 지혜와 자비를 갖추고 있다. 이를 대신심(大信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일체 중생에게 여래의 원만한 덕성이 본래 갖춰져 있다고 하는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인을 위해 선지식을 찾아가야 한다. 그는 성철스님이나 무산 스님 등과 같은 선사(禪師)로부터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 입전수수(入廛垂手)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실천하기 위하여 용왕매진해 왔다. 인우구망(人牛俱忘)과 같이 화두와 자기가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상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화두를 듣는 게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타파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심하지 말고 화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절대 중간에 포기하거나 화두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무아(無我)의 평심이 무엇보다 간절해야 한다.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수시로 나태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화두가 반본환원(返本還源)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입전수수(入廛垂手)로 회향한다.

 

이런 모든 전 과정, 깨침의 과정까지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원력을 가져야 한다. ‘()구보리 하()화중생하겠다는 원력을 갖고 정진하고, 널리 이웃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회향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이상향인 보살이다. 여러분 모두가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확인하는 원력을 세워 정진하고, 그 과정을 면밀히 거쳐 널리 중생에게 회향하는 그러한 불자가 되시기를 발원한다. 생각해 보니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게 되면 자연히 피안(彼岸)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거기가 바로 맑고 밝고 훈훈한 도피안(到彼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재경문학회 설균태 회장님의 질문이 있었다. 영진 스님이 출가하게 된 동기와 그 후에 후회한 일이 없었는지에 대해 질문하니, 스님은 답변하기를, “건강이 좋지않아 수행차 입산했지만, 선도(禪道)에 매료되어 거기에 몰입하게 됨에 따라 결국 불자(佛子)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후회는 없었고, 잘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만족해 하고 있는 편이다.”고 했다.

 

또한 수행 스님들과 행정 스님간에 갈등은 없었는가(?) 질문을 하니, 스님이 답변하기를, “갈등이 가끔있으나 그렇게 많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존중하는 입장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스님들도 암에 걸리는지 또 건강이 일반사람보다 좋은지에 대해 질문을 하니, “스님들도 암에 걸리기도 하고 중병을 앓기도 한다. 다만 정신적인 면에서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초연한 상황에서 병에 대처한다는 점에서 일반인과 비유하기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했다. 영진 스님은 어려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매우 차분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해 주었다.

 

특히 스님은 행정을 담당하는 스님보다 수행하는 스님이 보다 우위(優位)에 있고 참된 수도승(修道僧)이 아닌가 생각되었고, 생로병사를 대하는 입장에는 스님이나 범인(凡人)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수도승은 선경(仙境)에서 사는 듯이 맑고 깨끗한 청아(淸雅)한 면모를 엿볼수 있었다.

 

나도 질문을 하나 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제 처가 음식을 차려주어서 건강관리를 하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음식을 어떻게 먹고 잠은 얼마나 자는가에 대해 물으니, 스님이 말씀하기를, “하루에 2끼를 먹는데 아침에는 죽을 끓여먹고, 점심은 밥을 먹는데, 수도승들과 함께 먹고 있어서 건강에 하등의 이상이 없다. 잠은 4시간 정도 자는데 밤 12시에 자서 4시경에 일어나 활동하는데 남들보다 많은 불경을 외고 또한 여러 가지 엄청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분은 나()라는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부처님의 삶을 따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사(禪師)로서 진실과 실력을 갖춘 최상의 실력자라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실력은 그가 지나온 역정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아니 하루에 두 끼만 먹고 4시간을 자고도 우리보다 더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말만은 지금 방금 배웠듯이 무아의 지경에 놓고 믿고 따라갈 뿐이리라.

 

마지막으로 나는 시낭송을 하나 해도 되겠는가!고 하니 쾌히 승낙해 주었다. 나는 (생각하기) 마하트마 간디 시를 시낭송 했다. “생각을 잘 해야한다. 왜냐하면 잘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잘 해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을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훌륭한 인격을 만들기 때문이다. 훌륭한 인격을 만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멋진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스님을 비롯하여 모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사진을 찍고 아쉽게도 헤어졌다.

 

우리 일행은 12일 오찬을 하고 난후에 인제하늘내린센터 대공연장에서 개최한 27회 만해대상 시상식에 참석하였다. 만해대상 평화대상에는 우크라이나 국제구호단체 세이브 우크라이나가 수상됐고, 실천대상에는 불교계 국제구호NGO 더프라미스 이사장인 묘장스님과 의료복지협동조합 밝음의원 곽병은원장이 수상받았다. 문예대상은 천양희시인과 김동호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여기에는 김진태 도지사, 이양수 국회의원, 최상기 인제군수,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3교구 본사 신흥사 주지 지혜스님과 본말사 스님들, 동국대학교 윤재웅 총장과 지역주민들이 참석해 만해선사의 얼을 새기고 수상자들을 축하해 주었다. 우리 한국시인협회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나도 황포를 입고 참석하였는데, 폐회식 후 나오는 길에 김진태 도지사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함께 찍었다. 오늘의 이 사진도 길이 기억할만한 좋은 추억인데, 만해 한용운 선사의 도움이 아닐까 한다.

 

 

만해 한용운은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평화주의자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평화운동을 만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19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하여,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고, 그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한후,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등이 있다. 그의 생애 전체가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된 시대였는데, 그 가운데서 수행자로서의 문제의식의 중심에는 바로 평화가 화두가 되었다. 만해는 언제든지 제국주의와 민주주의가 부딪치는 현장에서 생명(生命)’의 보편성을 통찰했다.

 

그리고 이 생명성에 반하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그에 항거했다. 그의 평화관은 알수 없어요문학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만해는 존재 전체의 생명성에 대한 깊은 연민과 평화관을 보여준다. 만해의 평화관에 따르면, 당사자가 서로 대등하고 평등하지 못한 위치에서 구현되는 평화는 일시적이거나, 위장된 거짓평화일 수밖에 없다. 상대를 무릎 꿇려 얻는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평화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평화의 모습은 바로 알수 없어요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출발·세계 만해축전(2023 The Manhae Festival)을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만해축전에 가장 알맞은 알수 없어요시낭송을 하여 많은 시인협회 회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만해는 절대자라는 궁극적인 존재를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음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서는 '누구'를 위한 등불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열망적인 평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학술세미나에서 시낭송 했으면 했지만, 하지 못하였고 대상시상식에서도 발표해보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하여 차일로 미루게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두 행사 모두가 다 만해라는 알맹이는 없고 여러 껍데기만 가지고 행사를 치루는데 급급했다고 보여진다.

 

만해축전에서는 시교육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만해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만해축전 대상시상식에서도 여러 가지 사전행사가 있었지만 만해에 대한 시나 노래도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왜일까?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선지식(善知識)중에 무책임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한마디를 하더라도 깊이 생각을 해서 하라! 말을 할 때는 아홉 번 생각해서 말을 하고, 그 말의 태도는 진중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만해축전에서 만해의 그 정신이 살아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데, 다들 만해의 알갱이는 빠지고 왜 다른 주제로 시간을 보낸 것인지(?) 그에 대한 대답을 하여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만해축전추진위원회,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동국대학교, 조선일보,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등에서 많은 지원과 문화체육관광부,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 등지에서 후원을 해 주었으나, 실제적으로 서울에서 참가하여 많은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분들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강원도도지사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지적이 아닌가한다.

 

모처럼 만해에 귀를 기울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만 끝맺고자 한다. (.)

 

[출처] 만해마을과 만해축전 시상식 방문 후기 [작성자 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