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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위기의 대한민국, 다산에게 길을 묻다(14)

김은하기자 | 기사입력 2023/07/07 [21:04]

기획특집-위기의 대한민국, 다산에게 길을 묻다(14)

김은하기자 | 입력 : 2023/07/07 [21:04]

▲ 김만수 정치학 박사

 

편집자 주)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도를 넘는 극단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도덕불감증,“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되고, 정직하게 양심껏 순리대로 살아가면 손해 본다”는 식의 오도된 가치관이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이 같은 현상은 사회지도층으로 올라 갈수록 더 심각하다. 한마디로 위기 상황이다. 작금 대한민국은 200년 전 다산선생이“이대로 가면 조선은 반드시 망한다”며 개혁이나 경장보다 더 강력한 변통(變通)을 강조했던 시대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기획특집으로“다산정약용의 위민변통사상(茶山 丁若鏞의 爲民 變通思想)”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다산변통사상연구소장 마중물 김만수 박사와 함께 그 해법을 찾고자 한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마중물 김 만 수(정치학박사) (C)

 

 

 

 

 

 

마중물 김 만 수(정치학박사)

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현) 다산변통사상연구소장

현) 경상북도인재평생교육진흥원 경북학숙본부장

 

서신으로 세상과 소통하다

 

▲ 보물‘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정약용이 강진 유배 당시 다산초당에 조영한 네 가지 경물. 즉, 다조(초당 앞마당에 놓인 차를 끓이고 마시는 평평한 바위), 약천(초당 위의 옹달샘), 정석(다산이 해배기념으로‘정석’글자를 새긴 바위), 연지석가산(초당 연못 중앙에 돌을 쌓아놓은 조형물)에 대하여 읊은 칠언율시가 담긴 친필 서첩<국립농업박물관 소장> (C)

 

다산의 75년 삶이야말로 파란만장한 한편의 드라마 그 자체다. 앞에서도 자세히 언급했지만 다산은 5대에 옥당을 지낸 명문가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사회생, 네 살에 천자문을 익혔다. 열 살 전엔 모든 경서와 사서를 독파해 주변을 놀라게 했으며, 20세 전에 서양학문까지 섭렵한 영재다. 22살엔 과거에 수석 합격, 정조의 학문적 파트너로 사랑과 총애를 독차지했고, 30대 초반에는 수원화성 축조 시 거중기를 개발하여 공기단축은 물론 엄청난 공사비를 절감하는데 기여하여 향후 정승감이라는 찬사까지 받았으며, 30 중반엔 곡산부사와 경기암행어사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조로부터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이자 정치가로 종횡무진,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오히려 이 같은 돋보임 때문에 항상 이를 시기한 정적들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나이 39세 되던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신변의 위험함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다. 그리고 그는 별당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당호의 의미처럼 “매사에 조심하기를 겨울에 냇물 살얼음판 위를 건너듯이 하며, 사방에서 누군가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항상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을 가슴에 세기며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정조의 승하와 함께 의지하거나 보호해줄 세력이 없었던 다산은 정권 실세이자 정적인 노론벽파들의 주도로 자행된 신유교옥 사건에 연류되어 다산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나고 만다. ‘일사이적’(一死二謫)이라는 그의 표현대로 3형제 중 맏형 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둘째형 약전과 다산은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유배형을 받고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땅끝마을 포항 장기를 거쳐 전남 강진으로 유배 길을 떠난다. 다산의 나이 40에 벌어진 청천벽력 같은 대사건이었다.

 

“머뭇거린들 무슨 소용이냐/ 이미 정해진 이별인 것을/ 옷자락 뿌리치고 길 떠나/ 아득한 들을 넘고 물을 건너고 말았네/ 표정이야 비록 씩씩한척했지만/ 속마음 나라고 다를 수 있으랴”

 

생이별의 아픔을 참다못해 오열하는 처자식을 남겨두고 유배 길을 떠나야만 하는 자신의 가슴 아픈 심경을 담은 시 ‘사평별’의 일부다.

 

그리고 다산은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사평에서 헤어질 당시 안색이 좋지 않았던 아내를 걱정하며 두 아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 “너희 어머니의 안색을 보면 건강이 위험하니,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어머니를 보신시키고 약을 써서 다스리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자신을 대신해 집안을 건사해야 했던 부인을 향한 미안함과 애틋한 마음이 묻어난다.

 

유배지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산의 교육관, 생활철학, 학문하는 자세, 문학적 견해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편지를 통해 공부하는 법, 시를 짓고 독서하는 법, 경학하는 법, 벼슬하는 이가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 집안 내에서 행해야 하는 법도 등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더불어 폐족이 되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자식들을 안쓰러워하면서도 처한 상황에 굴하지 않도록 격려하였다.

 

특히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뜨거운 형제애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술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질문하는 편지글에서 도도한 다산사상의 핵심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선배나 동료,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산의 중심사상이 다른 저술에서보다도 더 극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특히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와 3년여에 걸쳐 주고받은 서한을 통해 맹자의 이른바 사단장(四端章)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일대 토론은 유학의 기본 문제들에 대한 다산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공부에 대하여

 

다산은 시간 날 때마다 두 아들과 제자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로 공부에 대하여, 대인관계에 대하여, 습관에 대하여 당부하는 글을 수없이 보냈으며 흑산도 둘째 형님 약전에겐 자신이 쓴 저작물들을 서신을 통해 수시로 감수 받으면서 세상과 소통했다.

 

다음은 폐족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한 두 아들을 격려하는 글이다.

 

“마음속에 진실로 조그마한 성의만 있다면 비록 전쟁과 난리 중이라도 반드시 진보할 곳이 있는 법이다. 보아하건데 집안에 책이 없느냐? 그렇다고 재주와 총명함이 없느냐? 그런데 어찌 자신을 폐족(廢族)이라고 생각하여 자포자기하려는 것이냐? 폐족은 오직 벼슬을 못한다 뿐이지 성인이 되는 것은 꺼릴 것이 없고, 문장가가 되는 것도 꺼릴 것이 없으며, 이치에 통달한 선비가 되는 것 또한 꺼릴 것이 없다. … 나는 이 삼사(三斯)로써 서재(書齋)의 이름으로 삼고 싶었으니 이는 난폭하고 거만한 것을 멀리하고, 비루하고 어긋남을 멀리하며, 믿음을 가까이 함을 일컫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덕을 높이기를 바라며 이 삼사를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들도 또 너희 서재에 이름하고 인하여 스스로 기문을 지어서 훗날 인편에 보내거라.”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슬프고 슬프구나. … 이러한 슬픔을 만나니 진실로 마음을 풀 수가 없구나. 너희들 아래로 사내아이 넷과 계집아이 하나를 잃었는데 … 모두 나와 너희 어머니 손에서 죽었으니 운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번처럼 가슴을 찌르고 저미듯이 슬프지 않았었다. 내가 머나먼 곳에 있어 작별한 지 오래인데 잃었으니 더욱 슬프구나.”

 

다산이 유배지에서 네 살 된 여섯째 아들 농아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남은 두 자식들에게 쓴 편지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대학자 다산이 자식의 죽음 앞에 어깨 처진 아버지가 되어 대성통곡했다. 보통 우리 아버지들처럼 말이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망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더욱 잘 처신하고, 훌륭하게 되어야 하며,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가지 밖에 없다”고 당부한다.

 

또한, “힘있는 자들에게 청탁하거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고 기분이 화평스러워져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는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독서와 관련하여서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드니 독서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독서란 마구잡이로 그냥 읽기만 한다면 백번 천번을 읽어도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독서 하는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그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책을 저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먼저 자기 뜻을 정해 만들 책의 규모와 편목을 세운 뒤 남의 책에서 간추려내야 맥락에 묘미가 있게 된다. 만약 그 규모와 목차 외에도 꼭 뽑아야 할 곳이 있으면 별도로 책을 만들 좋은 것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두어야만 힘을 얻을 곳이 있게 된다.”고 조언한다.

 

또 “사람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궁금한 것이 늘어나므로 늘 궁금증을 가져라. 그리고 진정한 공부란 교과서 밖에 있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명심하라”고 강조한다.

 

“모른다는 것을 알았으면 지금부터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것이 무식과 유식의 차이다.” 참 멋진 조언이다.

 

또 “부모의 인생을 공부하라. 부모가 살아 온 삶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똑같은 물을 먹어도 벌은 꿀을 만들고, 소나 양이 마시면 우유를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배움은 같아도 깨달음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리고 상대와 이야기할 땐 대화의 본질을 빨리 파악하고, 상대와 공감하고 그의 말과 글을 헤아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고기 그물을 쳐 놓으면 기러기란 놈도 걸리게 마련인데 이를 어찌 버리겠느냐? 스스로 재물을 사용해 버리는 것은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고,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질로써 향락을 누린다면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형태 없는 것으로 정신적인 향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질 이유가 없다.”

 

대인관계에 대하여

 

“좋은 친구를 만나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것이다” “원수는 잊고 은혜는 갚아라. 잊자고 하면 잊지 못할 것이 없고 갚자면 갚지 못할 것이 없다” “스쳐 가는 인연은 그냥 보내라.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인연은 아니다.”

 

“살아있어도 안 보이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관점을 바꾸면 그리 슬퍼할 일도 즐거울 일도 없을 것이다.” “부고를 알릴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일수록 더욱 신중해야 한다.” “신뢰는 후불이다. 믿음을 당겨쓸 수 있는 법은 없다.”

 

“삶의 질은 의식 수준이 좌우한다.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공감 능력을 키우도록 하여라. 공감은 지능이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단점보다 장점을 보아라. 단점만 보다 보면 종국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래 만나고 싶으면 존칭을 쓰는 것이 좋다. 배려와 존중을 통해 관계가 형성된다.”

 

습관과 태도에 대하여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습관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나는 내가 겪어온 세월만큼 단단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익숙해진 길에 길들여졌을 뿐이었다. 하루하루 내려앉아 나를 가두게 한 껍질, 그것이 습관이다. 나는 공부의 정점에서 60년간 쌓은 성취를 모두 내려놓았다. 그렇게 나를 모두 비우고 새로운 습관을 채우기 시작했다.”

 

다산이 선택한 생의 마지막 습관 그것은 매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 톨의 쌀을 남길 것인가? 사소한 습관이 미래의 나를 만들 것이다.” “말 습관을 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낭 빛을 갚는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 자칫 익숙한 것에 속아 새로운 것들을 만날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금주에 가까운 절주를 해야 한다. 지나친 음주는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유혹에 빠지지 마라.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다.” “공공재를 절약하라.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라. 유행은 언젠가 지나가는 것이고 나만의 철학과 사상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불필요한 습관을 없애라. 그 순간부터 인생에 가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늘 외모가 단정해야 한다. 사람의 내면은 외면에 걸맞게 나타나는 법이다.” “매일 웃는 습관을 가져라. 매 순간 웃지 못 할 날이 없다.”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라.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반쪽짜리 사람이다.” “잘난 척하지 마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물건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살아보면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한정된 시간이라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사소한 일에 목숨 길지 마라. 소탐대실하다가는 큰일과 마주한다.”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멀리하여라.” “마음에는 당연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있다. 타인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스스로에게는 당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반대가 되면 곤란하다”

 

“현명하게 칭찬하는 법을 익혀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잘못 칭찬하면 하고도 욕먹는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라. 그렇지 않으면 풍요 속의 빈곤에서 오는 상실감을 맛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단정 짓지 마라. 어설픈 단정은 틀림없이 오류를 남기게 된다.”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글

 

제자들에게는 학문과 정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정치에 관심을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

 

“독서는 위로는 성현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수많은 백성들을 길이 깨우칠 수 있으며 왕도의 정책을 도울 수 있어 짐승과 벌레의 부류에서 초월하여 큰 우주도 지탱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만 뜻을 두고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려 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벌써 이름이 없어질 것이니, 이는 금수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이 말을 꼭 명심하라.”

 

“상관이 엄한 말로 나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리가 비방을 조작하여 나를 겁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재상이 부탁하여 나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릇 봉록과 지위는 다 떨어진 신발처럼 여겨야 한다.”

 

아내의 치마폭에 마음을 담다

 

하피첩(霞?帖)은 다산이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쓴 서첩이다. 하피란 신부가 입던 예복을 뜻하며, 부인 홍씨(洪氏)가 보내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에 종이를 붙여 만든 서첩이다. 하피첩에는 아들인 학연과 학유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이 다양한 서체로 담겨 있다.

 

다산이 귀양을 떠난 지 십 년 정도 지났을 무렵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 한 벌을 보냈다. 이다. 다산은 부인이 보낸 빛바랜 치마를 마름질해 네 첩의 서첩을 만들었다.

 

▲ 보물 ‘하피첩’(좌/국립민속박물관 소장)과 ‘매화병제도’(우/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하피첩’과 ‘매화병제도’는 아내가 보내준 낡은 비단치마에 아들과 딸에게 보낸 편지와 서화로 아버지 다산 정약용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한 쌍의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C)

 

그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세 첩으로 첩의 순서는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세 첩 가운데 두 첩의 서문에는 각각 ‘1810년 수추(首秋)’와 ‘1810년 국추(菊秋)’라고 적혀 있다. 수추란 ‘가을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음력 7월을 말하며, 국추란 ‘국화꽃이 피는 가을’이란 뜻으로 음력 9월을 일컫는다.

 

표지는 다소 손상됐으나 본문 글씨 등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한 첩의 표지는 푸른색으로 박쥐무늬와 구름무늬가 장식돼 있으며, 나머지 두 첩의 표지는 미색 종이에 장황(裝潢) 처리되어 있다. 장황은 서화에 종이나 비단을 발라 꾸미는 표구를 말한다.

 

다산은 아내가 보낸 치마로 만든 하피첩에 아들들을 위한 글을 적었다. 하피첩 서문에는 ‘아내가 보내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잘라 작은 첩을 만들고, 경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준다’는 글이 적혀 있다.

 

본문은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등 아들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내용이 담겨있다. 하피첩은 행서와 행초서 등 여러 문체로 쓰여있어 다산의 전형적인 행초서풍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한 첩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가 실렸는데, 다산의 다른 서첩에서 찾기 힘든 자료라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또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치마로 하나뿐인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딸에게 선물로 보낸 서화가 바로 ‘매화병제도’이다.

 

‘매화병제도’ 상단에는 매화 가지에 두 마리의 새가 앉아있는 매조도가 그려져 있으며, 아래에는 정약용 특유의 행서체로 시구가 배치되어 있다.

 

특히 매조도의 그림이 깔끔하게 표현되어 다산의 선비다운 심성을 엿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새가 뜰에 날아와 매화가지에 앉았는데 이 새를 보고 함께 집 짓고 살자 한다"는 내용의 시구 옆에는 이 작품을 만들게 된 연유를 적은 작은 글씨도 발견할 수가 있다.

 

“내가 강진에 귀양살이한 지 수년이 흘렀다. 홍부인이 헌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는데 해가 묵어 붉은빛이 바랬다. 이것을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쓸만한 여분이 남아 딸에게 보낸다.”

 

즉, 유배 생활 중 부인이 보낸 낡은 치마폭을 활용하여 아들들에게는 당부의 말을, 딸에게는 그림과 시구를 적어 보낸 것이다.

 

유배생활 중에도 자식들을 떠올리는 애정 어린 인간 다산 정약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포항 장기면 소재 유배문화체험관 다산초당에서 유배체험중인 저자 김만수 박사 (C)

 

마중물 단상

 

다산은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서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다. 다산은 한국이 낳은 최대의 사상가이다. 다산 이전에 다산만한 사상가가 없었고, 다산 이후에도 다산만한 사상가가 쉽사리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오직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사색하고 저술하고 활동했다. 유배되기 전이나 유배기간 중이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은거할 때나 한결같이 자신의 영달보다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이 점이 그의 위대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또한 다산은 천재적인 재주와 능력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결국 정적들로부터 희생양이 되었지만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켰다. 방대한 저서의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고, 토지, 관제, 신분과 사회제도 개혁을 통한 이상사회 구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실사구시의 정신과 경세치용, 이용후생에 그 목적을 두고 실학을 집대성했으며, 실용지학을 소유한 인재를 육성하였다. 또한 세도정치에 나라가 병들고 관리들의 부패에 백성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던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며, 지배층의 각성을 일깨우려 하였다.

 

이렇게 학자로서 관료로서 위대한 다산이었지만, 언제나 그의 마음 한쪽을 허전하게 했던 것은 바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이었다. 고난의 유배 생활에도 늘 함께할 수 없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아버지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 정약용이라고 하면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서찰’이 바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것들은 가히 압권이다. 다산의 자녀 교육은 거의 유배지에서 보낸 서찰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하루를 열흘처럼 애타게 기다리다 너희 편지를 받으니, 반가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구나. … 생이별한 모든 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낮 슬픔에 젖어 사니, 이 어인 신세이더냐? 더는 말하지 말자.”며 다산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대학자이기에 앞서 다산도 똑같은 인간인데 가족과 생이별하여 낮설고 물 설은 머나먼 타지에 고립되어 고달픈 유배 생활을 보내면서 얼마나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도 싶고, 걱정되었겠는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곁에서 돌보고 보살피지 못하는 미안함을 달래려 안부와 당부를 묻고 전하고자 펼쳐 놓은 한지 위엔 눈물 반 먹물 반! 긴 밤 지새워 쓴 편지를 한양 천리 인편으로 보내 놓고, 답장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보내고 기다리고….

 

다산이 고달픈 유배 생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500권이 넘는 수많은 저서를 집필할 수 있었던 원천은 어쩌면 바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 다산의 고향 마을 풍경을 그린 홍현주의 <열상산수도> 상단에 다산이 시를 지어 넣었다.(개인 소장) (C)


원본 기사 보기:다경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