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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목민사상의 감회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2023. 3. 23. 오후 5시 운룡 도서관에서 세미나 개최

NGO글로벌뉴스 | 기사입력 2023/03/23 [19:15]

다산 정약용 선생 목민사상의 감회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2023. 3. 23. 오후 5시 운룡 도서관에서 세미나 개최

NGO글로벌뉴스 | 입력 : 2023/03/23 [19:15]

茶山 丁若鏞先生 牧民思想 感懷

▲ 운룡도서관에서 박석무 다산영구소장이 '다산 정약용 목민사상'을 강의하는 장면  © NGO글로벌뉴스

다산의 학술은 우리나라에서 드물어 효제와 독서로 그 이름 역사에 빛나도다

 

공익과 공평은 비단같이 고귀하고 청렴과 청략은 옥돌같이 아름답구나

후생을 이용해서 백성을 혁파 계도하고 실사를 구존해서 동족을 개혁 살찌게 했네

민본의 훌륭한 인재가 혼백을 주체삼아 애국충정으로 사람 성심을 귀하게 만들고 있구나

(七言律詩 平起式 正格, 微統: , , , ,

 

2023. 3. 22.() 오후 5시에 운룡도서관에서 개최한 박석무 다산연구소장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사상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 NGO글로벌뉴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산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는 우리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더욱 더 명확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돈이나 권력을 추구해 나가는 속물이 되지말고, 인간이 되어라. 즉 효제를 하고 시간이 되거든 독서를 하라는 말이다. 오늘은 매우 바쁜 날이었다.

 

오전에는 성균관 대성전에서 개최하는 삭망분향이 있어서 참가하였는데, 이번 성균관장 선거에서 당선하신 최종수 성균관장을 만나 사진도 찍고 축하인사 말씀도 전달한 것이 가장 의미가 있는 하루가 아닌가 한다.

  © NGO글로벌뉴스

그리고 또한 길거리 헤푸닝이라고 할까나 김익수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하는데, 천영길 에너지 실장을 광화문길 4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하게되었는데, 참 인연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기쁨을 맛보게된다. 옛날에는 지나가는 사람만 만나도 서로 손을 잡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러나 지금에는 옆에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못본체 눈길을 돌린다는 이야기도 남의말 같지가 않다.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는 입장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의 가치가 너무 값없게 느껴져서 인생이 많이 서글퍼진다. 왜 이리되어졌을까?

 

오늘의 주제에 가까이 왔다. 우리가 사람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에 따라 그 만남의 정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빠지게 몰두되어 있어서 인간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박석무 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다산은 첫째가 孝弟요 둘째가 讀書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새김을 형제와 같이 우애깊게 사람을 새기라고 충고를 한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상을 좀더 넓고 깊게 이해하라고 한다. 우리가 우애있는 사람이라면 그 옛날사람마냥 그 만남의 여운이 매우 흥겨웠을 것이다. 얼마나 즐거웠을 것인가!

 

그 느낌 만나는 사람마다 쾌활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그 정을 생각해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무 뜻밖에 만남에 서로 어리둥절하면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서로 바쁘게 살고 있기에 이렇게 잠시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그 순간만이라도 인간의 정을 느꼈다고 보여진다.

내 뒷전에 그가 매우 크게 보여졌다. 그러나 그 즐거운 심정은 다소 느그러졌던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본다. 아무튼 김익수 교수님과 만나서 차한잔 하면서 대한노인회 경노효친의 현대적 이해라고 하는 논문 수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에는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하리라고 다짐을 하면서 헤어졌다.

 

오늘은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는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살면서 오직 멸사봉공으로 나라를 위해 살았던 분이시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천재로 할만큼 공부도 했고, 정조의 신임을 받아 국가경영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수원화성을 축조도 하였다. 천재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 시기였다.

 

그가 10년만 더 오래 국가경영을 했다면 우리나라 역사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정조(사도세자의 아들)가 돌아가실 때가 그의 나이 40대로 아주 좋은 때였는데,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정조의 상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다. 여유당은 도덕경(道德經)에서 따온 것으로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는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의미다. 어쩌면 정약용은 이미 폭풍이 몰아칠 정치의 기상도를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그의 가치관은 효제(孝弟)요 독서(讀書)”가 있을뿐이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박석무 편역)에서 보면,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가 그것이다.

 

반드시 먼저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학문이 이미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18년동안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준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과 같이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정약용과 같이 효제를 실천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가 유배지에서 18년동안 작성한 책이 500여권이나 된다고 한다. 특별하게 국가를 위한 모든 국가제도에 대한 개혁방안이었다.

 

바로 경세유표였고, 좀 더 직접적인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의지에서 목민심서를 만들었다. 인명을 중시해 원옥(寃獄)이 없도록 인권을 보장하는 흠흠신서도 만들었다. 그가 유배지에 가지 않았더라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점에서 좋고 나쁘다는 것을 한말로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가 유배지에 가게되었기에 구구절절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탄생할수 있었고, 그 위대한 서적도 탄생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한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 그리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요 기치로 내걸었다.

 

다산은 기존의 성리학으로는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산의 실학사상은 성리학이 주장했던 인간의 지위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상이 사회 속에서도 잘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이었다.

 

, 실천적 당위를 강조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정치적 개혁은 물론, 경제적 욕구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적 개혁, 마을 단위의 애국애족을 기초로 한 자주국방의 군사적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식개혁을 먼저 들수가 있다.

 

다산은 국가의 근간인 백성들의 민생을 개혁하여 생존 여건을 구축함으로써 튼튼한 국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말하자면, 실질적인 삶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한국 고유한 효제 중심의 평화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서였다고 볼 수 있다.

 

둔졸난충사(鈍拙難充使)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란 다산이 28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나서 지은 자신의 각오를 잘 표현한 시로서, “자신이 무능해 임무수행에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충성을 다해 일을 완수하리라는 말이다.

 

얼마나 훌륭한가! 자신을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고 최선을 다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선비정신을 보여준 특출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 임하여서도 우리의 복지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 앞에 다산이 제시한 훌륭한 실생활의 개혁사상을 불러일으켰으면 하는 생각이 인다. 그는 일흔넷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파란만장한 생애였지만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저술을 통해 남기고 생애를 마무리했다. 이 점에서 그는 행운을 얻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죽어서도 한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가 사후 1백여 년 뒤인 식민지시기에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다산연구소가 발족되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선양사업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 일대와 강진의 유배지에서는 그와 관련된 유적유물을 보전·전시하고 있다. 특별히, 앞으로 5월에는 다산초당으로 12일 역사문화탐방을 한다고 하니 기대해 본다. 이만 끝맺고자 한다.(.)

 

[출처] 茶山 丁若鏞先生 牧民思想 感懷|작성자 黃布 閔貞基